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티오피아 제국 (문단 편집) ==== 하일레 셀라시에 ==== ||[[파일:450px-Haile_Selassie_in_full_dress_cropped-e1604342214825.jpg|height=300]]||[[파일:crownationofqadamawihaileselassie.jpg|height=300]]||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하일레 셀라시에의 대관식|| 에티오피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던 메넬리크 2세는 말년에 몸이 점차 허약해지기 시작하자 제위를 외손자인 [[이야수 5세]]에게 넘겼다. 이야수 5세는 1913년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메넬리크 2세 시절의 고위 관료들과 섬정에 둘러싸여 간접적으로 에티오피아를 통치했고, 이는 충동적인 성격의 이야수 5세에게는 전혀 걸맞지 않은 방식이었다. 점차 이야수 5세와 메넬리크 2세 시절 임명된 궁정 관료들 사이에는 깊은 골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개중에는 이야수 5세의 통치력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가 국교인 나라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등 초대형 병크를 터뜨리면서 스스로의 국내 입지를 약화시켰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 기미를 보이면서 서구 열강들의 의심을 샀다.[* 당시 에티오피아에서는 식민 열강인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들을 타도하자는 동맹국들에게 끌릴 수 밖에 없었으며, 게다가 대전 초반에는 동맹국들이 승승장구하면서 황제의 마음이 동한 것이다.] 결국 이같은 갈등은 쌓이고 쌓이다가 1916년 이야수 5세가 [[하라르]]에 머무르는 틈을 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외세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인들에 의해 권좌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메넬리크 2세의 딸인 [[자우디투]]가 에티오피아의 여황제로 즉위했다.[* 이야수 5세는 제위에서 쫒겨난 이후에도 꽤나 오래 생을 연명했다. 후임 황제로 즉위한 자우디투는 나름 이야수 5세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이야수 5세를 유폐한 대신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자우디투 이후 즉위한 [[하일레 셀라시에]]는 그딴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탈리아 등이 이야수 5세를 에티오피아의 황제로 복위시킬 움직임을 보이자 결국 이야수 5세를 1935년 11월 처형하고야 만다.] 1916년 새로운 여제로 즉위한 자우디투는 1930년까지 재위했다. 그녀는 메넬리크 2세부터 이어져 내려온 개혁 정책을 유지했으나, 천성이 보수적이었던 탓에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다. 이와 같은 정책은 급진개혁파의 수장이자 황실 일원이었던 터퍼리 머콘는(ራስ ተፈሪ መኮንን/Ras Täfäri Mäkonnǝn)[* 참고로 터퍼리 머콘는, 즉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에티오피아 황족 최초로 전세계를 순회한 인물이기도 하다.]의 반감을 샀고, 여제와 터퍼리 머콘는 사이의 거리는 점차 벌어졌다. 점차 여제를 지지하는 파벌과 터퍼리를 지지하는 파벌로 궁정이 쪼개졌으나 여제는 국정을 서서히 방치하면서 거의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했다. 결국 자우디투 여제의 재위 말년에 이르자 에티오피아의 실권은 터퍼리 머콘는이 장악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자우디투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국정에 관심을 끊은 채로 살았다. 1930년 4월 2일 자우디투가 사망하자 황위는 자연스레 터퍼리에게 넘어갔고, 터퍼리가 [[하일레 셀라시에]]라는 이름으로 즉위하니 이 하일레 셀라시에가 바로 에티오피아 최후의 황제이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메넬리크 2세의 현대화 정신을 계승하여 1931년 메이지 헌법을 모델로 한 에티오피아 최초의 성문헌법을 채택했다.[* Bahru Zewde, A History of Modern Ethiopia : 1855–1991 , second edition (Oxford : James Currey, 2001), p. 110] 일본을 모델로 한 입헌군주국을 추구했기에 헌법을 통해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을 성문화했으며, 여러 근대 문물을 들여온다. 또 [[일본 제국]]과의 관계에 관심이 깊어 1931년에 일본 제국에 사절단을 보내고, 일본에게 에티오피아 내 토지를 대여해 상공업 시설을 설치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이전부터 끊임없이 이어져오던 악습인 [[노예제]]를 완전히 법적으로 철폐하였으며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치안을 강화하는 등 대대적인 근대화 개혁을 실시하면서 나름대로 치세 초반의 업적을 쌓았다. 이탈리아에 대한 항전에서도 크게 활약하였고,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창설을 제창하였으며 자메이카에선 살아있는 신으로 모셔진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순탄하게 개혁 정치를 펴나가던 중인 1935년,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기어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티오피아를 식민화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국제연맹]]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 침략전쟁을 일으킨 무솔리니는 [[아드와 전투|40여 년 전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탈리아의 전력을 에티오피아에 쏟아부었다. 에티오피아는 끝까지 이탈리아군에 맞서 항전을 지속하였으나, 아무래도 엄연한 열강들 중 하나였던 이탈리아의 진심을 담은 공격을 버텨내기는 어려웠고 결국 1936년에 수도 [[아디스아바바]]가 이탈리아의 손에 떨어졌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영국의 [[런던]]으로 망명을 떠나 이탈리아의 불법 행위를 규탄하며 [[망명정부]]를 차렸고, 에티오피아 내부에서는 게릴라 군대가 결성되어 이탈리아 주둔군을 끝없이 괴롭혔다. 무솔리니는 전쟁을 대승리로 포장하고 에티오피아 합병을 선언하였으나,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대부분 국가들은 이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파일:Abyssinian-soldiers-1936-142348340618.jpg|height=300]]||[[파일:Emperor-Haile-Selassie-at-Victoria-Station-1938-1280x951.jpg|height=300]]|| ||1935년 당시 에티오피아 기병대의 모습. ||[[런던]]으로 도피해 망명정부를 꾸린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해당 모습은 런던의 빅토리아 역에 막 도착했을 당시의 모습이다.] || 이탈리아는 강점한 에티오피아를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합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세우고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에티오피아의 황제를 겸임하게 했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통치는 약 6년여 정도밖에 가지 않았으나 에티오피아에 남긴 상처는 컸다. [[로돌포 그라치아니]] 장군은 누군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3만 명을 학살했으며, 인종차별적 법안과 강제 노역 등으로 인해 에티오피아인들은 온갖 수모를 겪으며 비참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1941년 1월부터 시작된 영국군 주도의 '아프리카 작전'에 이탈리아 점령지 통치는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고, 1941년 5월 [[아디스아바바]]가 영국 주도의 연합군[* 영국군 외에도 자유 벨기에군과 그때까지 에티오피아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에티오피아 저항세력 등이 이 '아프리카 작전'에 참가했다.]에 의해 해방되면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와 망명 정부는 환도하는 데에 성공했다. 1947년 연합국과 이탈리아 정부 간에 체결된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 의해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은 그 합법성 자체가 부정되었고 동시에 이탈리아 정부는 에티오피아 정부에 전쟁 배상금을 지불했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 에티오피아는 [[국제연합]]의 창립회원국이 되었으며 1948년에는 [[오가덴]] 지역을 얻어냈다. 에티오피아의 영토였다가 1880년대에 이탈리아에게 빼앗겼던 [[홍해]] 연안의 [[에리트레아]] 지역은 1952년 다시 차지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개전 전부터 꾸준하게 진행해왔던 개혁 정책을 계속 실시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세제 정책을 개편하였으며 사회적으로도 근대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황제의 노력은 지나치게 부족중심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에티오피아의 당시 상황에는 제대로 들어맞지 않았으며 워낙 귀족들과 기득권 세력들의 반대가 심했기에 제대로 개혁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특히 1941년부터 약 20여 년 동안 황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바로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독립'''이었다. 당시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산하 교회로 정교회의 모든 주교들은 총대주교의 임명을 받는 하위 주교들이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에티오피아 교회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위해 끝없는 로비를 통해 에티오피아 교회 독립을 요청했고, 결국 1959년에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부터 독립하는데에 성공했다. 1955년 11월에는 그의 실버 주빌리에 맞추어 수정헌법을 발표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이 헌법에서 하원을 선출직으로 만들고 이 곳에 입법권을 부여하면서 나름 민주주의적인 내용을 많이 담아내는 동시에 여전히 황제의 강력한 권한은 유지했다. 또한 전국민들을 대상으로 기초적인 교육을 실시하면서 에티오피아의 학력은 빠른 속도로 올라갔고, 중앙정부에게 지나치게 반항적인 지방에는 반쯤 자율권을 부여하면서 최대한 부족, 지방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 개혁 정책 역시 에티오피아의 지나치게 경직된 원시적인 부족 중심 사회, 그리고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들의 극렬한 반대로 큰 성과는 내지 못했으며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개혁 속도는 거북이 기어가는 속도로 이루어졌다. 1950년대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한국 전쟁]]에 [[한국]] 편을 들어 원군을 파병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형제의 나라[* 애초에 튀르키예인이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건 [[돌궐]]에서 이어지는 튀르크족 민족 의식 때문이지 한국 전쟁 참전 때문이 아니다.]라고 하는 [[튀르키예]]는 [[공산주의]]의 위협 때문에 [[6.25 전쟁]]의 참전을 했지만 에티오피아는 오직 정의를 위해 참전을 하였다.[* 정확히는 유엔이 창설되었을 때,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자신이 주장한 집단 안보라는 대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파병한 것이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16개 [[유엔]] 참전국 가운데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상군 부대를 파견한 유일한 국가였다.[* 남아공도 참전했지만 이쪽은 지상군이 아닌 공군을 파견했다.] 한국 파병부대 출국 신고식에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한국 파병 부대 이름을 ‘카녜우(ቃኘው) 대대’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고, 부대원들에게 "한국의 자유를 지켜라"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카녜우'는 암하라어로 ‘격파하다’ 라는 뜻이다. 카녜우 대대는 1953년까지 5차에 걸쳐 총인원 6,037명이 참전하여 253번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전승의 신화를 만들었다.''' 121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으나 포로는 한 사람도 없없고 전장에 전우의 시신 한 구도 두고 오지 않았다. 이는 전우를 두고 가지 않겠다는 전우애와 이기든지 죽든지 둘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했던 그들의 용맹성 때문이었다. 대대는 전투 수행뿐만 아니라 1953년에 동두천에 보화교육원을 건립하고 1956년까지 한국인 고아들을 돌보기도 했다. [youtube(_R4YWYQnhao)] 1968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정도로 한국과 가까운 사이였다. 국가기록원 영상자료에 보면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방한 영상이 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재위기의 에티오피아 국내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1960년 12월에 황제가 [[브라질]]을 국빈방문했을 당시, [[친위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태자 암하 셀라시에를 황위에 앉혔다. 비록 이 쿠데타는 정교회의 지지도 받지 못했으며 경찰력에 의해 간단히 분쇄되었으나, 강제든 자발적이든 황태자가 가담한[* 암하 셀라시에 황태자는 자신은 결코 이 쿠데타에 찬동하지 않았고 반란군이 자신을 강제로 즉위시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황궁의 애완사자에게 먹이를 주는 황제의 사진을 보고 분노한 사람들 중 황태자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는 자발적인 참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쿠데타로 인해서 국민들 사이에서 전제군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퍼지게 된다. 제정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갈수록 험악해졌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개혁 정책 덕분에 학력 수준이 크게 높아진 중산층들은 오히려 황제의 독재와 오랜 철권통치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한편 에티오피아 치하의 [[에리트레아]] 지방은 갈수록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만 갔다. 서구권은 에티오피아에게 에리트레아의 자치 의회 구성을 허가하고 상당한 자율권을 양도할 것을 요구했는데, 황제는 이 제안에 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자치 의회를 폐쇄해버리면서 에리트레아 독립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기본적으로 친서방 외교정책을 폈다. 이전의 서구 열강들과의 관계를 청산했으며, 망명 시절 자신들을 도와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냉전]] 시기 에티오피아가 [[소련]]의 심기를 거슬러 좋을 것도 없었기에 일단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였고, 1961년 9월에는 [[베오그라드]]의 회동에서 미국의 [[제1세계]], 소련의 [[제2세계]]에 둘다 속하지 않는 [[제3세계]]의 모임인 [[비동맹운동]]에 참여하면서 중립적인 성향을 유지할 것을 천명했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 내부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도 신경을 써서 현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인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창립국이 되었으며, 통일기구의 본부를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두는 데에 성공했다. 황제는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초대 의장으로 취임하면서 [[모로코]]와 [[알제리]] 사이의 국경 갈등을 성공적으로 중재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에티오피아 제국은 겉보기에는 전혀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국제적으로도 존중받는 리더들 중 하나였으며, 에티오피아 내부가 어떻든 간에 국제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시기 망명까지 하면서 이탈리아 등과 맞서 싸운 용감한 국왕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외교적으로도 적절한 줄타기 외교를 선보이면서 미국과 소련의 반감을 최소화했으며, 한편으로는 경제적 투자를 이끌어내면서 나름의 성과를 냈다. [[베트남 전쟁]]을 무의미한 소모적 전쟁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미국과의 인권, 경제 협력에 나서면서 친미적인 모습을 보였고 [[캐나다]]의 [[몬트리올]]을 국빈방문하면서 캐나다와의 관계를 격상했다. 황제는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장례식,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에도 참석했고 1970년에는 원수지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이탈리아]]를 국빈방문하며 주세페 사라가트 대통령을 만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